지난 2006년 CBS 방송 리얼리티 쇼 ‘서바이버(Survivor)’에서 아시안 최초로 우승을 차지해 화제를 모았던 권율(47·사진)씨는 지난달 30일 LA한인타운에서 열린 ‘차세대 리더십 콘퍼런스’에 참석해 “미국 내의 아시안 리더십은 여전히 미흡한 상황” 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주류사회에서 주목받고 인정받는 아시안 CEO나 리더를 떠올리기 힘들다”면서 “리더십 부재로 인해 아시안들은 여전히 조용하고 투명한 소수계(silent and invisible minority) 취급을 받는다”고 지적했다.
한미연합회(KAC)와 미주한인위원회(CKA)가 공동 주관한 이날 행사에서 그를 만나봤다. 5월은 아시아 태평양계 문화유산의 달이다.
“아시안 리더십 부족 멘토 없기 때문”
공부·일만 강조하면
강박·우울증 시달려
지나친 엄격은 역효과
권율씨가 서바이버에서 우승을 차지한 해는 2006년. 당시 그의 우승은 한인사회를 넘어 주류사회에서도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예일대 로스쿨 졸업 수재가 근육질에 식스팩을 갖춘 데다 시리즈 내내 빼어난 리더십을 선보였다. 시청자들은 매료됐다. 경쟁자들이 그의 리더십과 지략에 놀라 붙여준 별명이 ‘대부(Godfather)’였다. 그동안 미국 대중문화에서 아시안 남성은 항상 범생이 이미지만 부각돼 왔는데 권율이 이런 고정관념을 깨트렸다. 피플지 ‘가장 섹시한 남성 50인’에도 선정됐다.
그런데 권씨는 화면으로 비친 이미지가 실제 자신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고 했다. 그는 본지와 인터뷰에서 “극도로 내성적인 성격을 고치기 위해 서바이버 출연을 결심했던 것”이라며 “서바이버 우승도 이후 나의 삶에 계속 짐이 됐다. 면접을 볼 때마다 ‘네가 연예인이냐. 여기서는 잘난 척하면 안 된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고 했다.
권씨는 평생 강박증(OCD)과 공황장애에 시달렸다고 했다. 그는 “과거 한국에 초청됐을 때 한국 학생 자살률이 굉장히 높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학생들에게 더 부담을 주기 싫었다. 분명히 고통을 숨기며 사는 한국 학생들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해 나의 정신적 문제들을 고백했다”고 했다.
뉴욕 퀸즈의 플러싱에서 소수 인종으로 또래들에게 늘 놀림과 조롱의 대상이었던 그는 항상 외톨이로 지냈다. 그러다 한번은 덩치가 큰 아이 셋이 왜소한 아이에게 돌아가면서 소변 보는 것을 목격한 뒤로 권씨는 학교 화장실은 물론, 극장이나 쇼핑몰 같은 공공장소에서 소변을 보지 못하는 정신적 장애가 생겼다. 이때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과민성방광증후군(Shy bladder syndrome)에 시달려 정상적 활동이 불가능했다고 했다. 특히 아시안 가정에서 이러한 정신적 문제를 털어놓는 것을 금기시하는 환경도 그를 더욱 힘들게 했다.
권씨는 부모들의 엄격한 가정 교육 속에 자랐다고 했다. “예의범절을 늘 강조했는데, 이러한 엄격한 교육이 사회생활에는 큰 지장을 줬다”고 했다. “주류사회 진출 뒤에도 윗사람들에게 할 말을 못 할 때가 많았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을 보면 목소리를 크게 내지 말라는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러한 저자세는 주류사회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페이스북에서 근무하면서 자신을 뜯어고쳐 나갔다고 했다. 당시 그의 말을 항상 무시하던 매니저에게 미팅을 요청하며 처음으로 불만을 제기한 것이다. 그러면서 매니저 행동이 개선되는 것을 느꼈다. 또 그는 어떤 미팅에서건 무조건 첫 번째로 입을 열자고 스스로 약속했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말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던 그는 어느새 미팅을 주도하고 의견이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으로 변모했다. 또 적극적으로 멘토를 찾아 나섰다.
그는 아시안 부모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는 것만 강조하다 정작 중요한 리더십을 잃게 했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건 절반만 가르쳐주는 것”이라며 “아시안 사회는 멘토를 어떻게 찾는지, 네트워크를 어떻게 형성해 나가는지에 대해서는 독려하지 않고 있는 게 아쉽다”고 했다.
스탠포드대 이론전산학과와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한 권씨는 이후 벤처 법률그룹, 조셉 리버먼 연방상원의원 법률팀을 거쳐 구글 비즈니스 운영전략팀, 연방통신위원회(FCC) 소비자 및 정부관계 부국장, PBS 방송 진행자, 페이스북 프로덕트 매니지먼트 국장 등 경력을 쌓았다. 2013년부터는 페이스북을 거쳐 구글까지 줄곧 IT업계에 몸담고 있다. 그는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아시안을 이끌어주는 파이프라인이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고 했다.
그는 “아시안이 고위 매니지먼트로 올라서지 못하는 이유가 그들을 이끌어주는 멘토가 없기 때문이라는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연구결과가 있다. 리더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 쉼 없이 배우고 익히며 습득해가는 것”이라며 “멘토는 ‘내가 당신의 멘토야’라고 말해주는 사람을 기다리는 게 아니다. 찾아 나서야 한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새로운 환경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내몰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원용석 기자